한옥관련

[스크랩] 한국전통건축체계와 건축가...

구름나그네59 2005. 5. 14. 09:33
 View Articles

Name  
   최성호 
Subject  
   한국전통건축체계와 건축가



지금의 집과 과거의 집이 다르다는 것은 곧 집을 짓는 방식이 현재와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집을 짓는 행위도 역사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므로 집을 짓는 과정에서 참여하는 모든 사람의 작업의 내용, 역할, 그리고 사회에서의 대우 정도가 달랐을 수  밖에 없다. 과거의 건축행위에서 현재와 다른 모습을 찾아 밝혀 보면 과거의 건축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개개의 건축행위자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요사이 과거 건축행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하려는 노력이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매우 바람직한 것으로서 앞으로 더 활발하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를 돌아보고 재단하려는 시도에는 우려가 되는 점이 있다. 역사가 사가(史家)의 관점에 따라 변화된다고는 하지만 역사를 해석하는데는 엄밀하고 객관화되어야 한다. 객관화된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하고 그것을 현재에 적용하는데는 자유로워야 한다. 객관화되지 못한 관점으로 역사를 해석할 경우 과거에 대한 왜곡으로 이어지고 과거의 연장인 현재에 대한 정의도 잘못되어지므로 항상 주의가 필요하다.

현대 건축에 있어 <건축가>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서양건축이 <건축가>의 능력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일부 <건축가>들 사이에서 우리 나라에서 과거 건축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건축가>가 사대부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옳다고 볼 수도 없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이해하고 또한 현재의 기득권을 계속 지속하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과거는 현재와 달랐다. 현재의 건축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건축을 하였고 건축자체도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누가 <건축가>였으며 어떠한 위치에 있었다는 논의를 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건축가>의 개념으로 해석하려 한다면 우리 과거에서 <건축가>라는 의미가 과연 있었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하며 그 논의의 출발점은 우선 건축시스템 차이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우선 현재 건축이 이루어지는 체제에 대하여 먼저 알아보고 우리의 과거 건축체계를 알아보기로 한다.  


현재와 과거 건축체계의 차이

요사이 건축은 <건축설계>와 <시공>으로 나뉜다. 설계 이전에 어떠한 집을 어떤 규모와 방법으로 지을 것인가를 사전 검토하는 <기획>이라는 분야가 있지만 아직 우리 나라에서는 덜 발달된 분야이다. 그리고 설계에서도 더 세분하면 <계획설계>와 <기본설계>로 나뉘고 설계 후 시공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감리>라는 분야가 있다. 또한 시공도 공정별로 세분하게 되면 수많은 분야로 나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건축의 과정이 시대가 변화에 따라 보다 세분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이다.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조건이 생기면 그에 따른 공정이 생기고 새로운 직종이 분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명칭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그 시대의 산물이다.

16세기 르네상스 이후 서양 제국주의 진출은 다양한 건축을 창출하였다. 특히 산업혁명이후 건축의 다양성은 증진되어 여러 용도의 건물이 만들어졌다. 공장, 집회장, 그리고 교량 등의 다양한 구조물 등이 만들어진다. 또한 유럽은 역사의 여명기에서부터 다양한 교류가 있어왔다. 유럽에 속한 각 나라는 고유한 집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각각의 특징들이 일찍부터 이루어진 교류 때문에 서로에 영향을 미쳐 다양한 집의 발전이 가능하였다. 따라서 유럽 건축은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발전되어 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건축에 있어 다양한 재료와 형태의 추구는 집을 디자인하는 사람의 재능에 많이 좌우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방향으로의 발전은 건물을 디자인 과정에서 통합관리하는 사람 즉 건축가의 역량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건축가라는 위치가 상대적으로 우위에 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건축은 이와는 다른 모습으로 발전한다. 우리 건축의 모습은 매우 단순하다. 우선 산업의 단순화는 다양한 건축의 발전을 저해한다. 우리 경제가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이다 보니 건축이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아마도 공업이 발전되었다면 우리 건축도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재료의 단순화도 건축을 다양하게 발전시키는데 한계를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건축을 하는 행위는 단순해 질 수밖에 없고 또한 전문분야의 발전을 이끌어 내는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의 구조가 단순했다고 하여 우리의 건축이 발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조 초기와 후기를 비교하면 공장의 명칭이 다양하게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한국건축공장사연구/김동욱/기문당/11장참조) 이는 건축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각 분야가 세밀하게 발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이라는 것은 목조 건축의 한계 내에서의 발전이다. 우리 건축은 전혀 다른 건축구조방식의 사용이 도입된 예가 거의 없다.

벽돌이라는 재료도 조선조 말에 화성이라는 축성공사를 통해서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벽돌의 사용은 화성으로 끝나고 근세기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특히 민간에서의 사용은 아산의 윤보선 생가(중요민속자료 196호/1907년)에서 보듯이 근세에 들어 이루어진다. 따라서 과거의 건축은 공법이나 그 용도의 다양성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건물의 형태라는 것도 자연환경과 재료의 한계 때문에 더 이상의 변화가 없었다. 지역적 특성이 고스란히 살아 전승된 것이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재료의 다양성을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 건축에서는 기본적으로 초가집과 기와집이라는 두 가지 경우로 대별된다. 이러한 한계는 다양한 형태에 대한 추구를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여러 가지 건축의 단순성은 건축에 관계된 직업의 발달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앞서 말하였듯이 다양한 건물의 요구는 새로운 기술을 탄생시킨다. 서구 건축이 발전된 것도 다양한 요구에 부응하여야 한다는 명제가 있었다. 서구건축 역사에서도 19세기와 20세기초 건축은 <건축가> 손에 의해 발전되었다기 보다는 엔지니어의 새로운 시도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러한 변화를 바탕으로 <건축가>는 새로운 개념의 건축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요구가 없을 경우 건축의 발전은 거의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건축은 근본적 한계를 가지고 이루어져 왔다.

현재 건축에 있어 전통계승의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 변화가 농업사회에서 산업화사회로 급격하게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이전에 산업화사회로 전이되는 과정을 거쳤다면 많은 재료의 시험과 여러 용도의 건물을 우리의 손으로 실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며 그에 따라 건축도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과정을 가지지 못하다보니 현재의 사회상과 과거의 사회상과의 괴리가 생기고 각각의 사회상에 맞추어진 세워진 집들 간에는 맞추어 갈 수 없을 만큼 많은 간극이 생기고 말았다.


우리건축에서의 <장인/건축인>의 위상변화

다음으로 우리 건축활동의 역사와 그에 따른 <장인>들의 역할 변화에 대하여 살펴보자. 인간이 존재하여 온 이상 건축활동은 계속되어 왔다. 삼국시대 이전 기록과 유물은 거의 사라져 정확한 건축의 역사를 알기 힘들다. 그러나 삼국시대건축의 흔적은 유물과 기록으로 얼마간 파악된다. 건축물에 대한 것은 별도로 하고 기록에 나타나 있는 건축활동과 건축인의 역할에 대하여 살펴보자.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없지만 <삼국유사>에는 몇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삼국시대에는 <장인>들의 대우가 매우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권 3 탑상편>에 있는 황룡사 구층탑에 대한 기록을 보면 탑을 세우기 위하여 보물과 비단을 주고 백제의 장인을 초청하였다는 기록과 '아비지는 재목와 돌을 다듬고, 이간 용춘(伊干 龍春)은 소장 200인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하였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신영훈선생은 태종 무열왕의 아버지인 용춘을 거느리고 일을 하였다고 해석하고 또한 이렇게 왕족을 거느리고 일을 할만큼 사회적 신분과 존경을 받았다고 해석하고 있다.(인터넷 사이트 한옥문화원/자료실/장인 편 참조)

또한 백제의 경우 와박사(瓦博士)와 노반박사 등의 명칭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잘 분화된 건축조직을 운영하였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발굴된 와당의 파편이나 석탑의 모습으로 보아 대단한 기술을 가진 <장인>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또한 명칭도 '박사' 등 별도의 칭호를 붙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도 <장인>에 대한 대우는 어느 정도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장인>들이 무관직의 직책을 받은 기록도 있고 문종 때에는 <장인>의 자손이 무관직이 아닌 현직 고위직에 올라갔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장인>에 대한 대우가 어느 정도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김동욱은 고려시대 장인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위직으로 正三品 堂下官으로 추정하고 있다.(한국건축공장사연구/65쪽참조) 이러한 조직이 무신정권과 몽고전란으로 피폐화되면서 관변조직은 와해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새로운 정권 창출에 걸맞게 많은 건축조영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관에 속한 <장인>조직의 재편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조건에 맞추어 관변조직이 조정되었지만 <장인>에 대한 대우는 이전만 못하게되었다. 조선조 초 세종 30년 작성된 남대문 조성에 대한 기록에는 대목(大木)의 직위가 正五品 武班職이었으나 성종 10년에 작성된 기록에는 품계가 正三品이지만 실제의 직책은 正九品이었다.(한국건축공장사연구/125-128쪽참조) 이러한 변화는 조선조 초기부터 계속되어 왔던 <장인>의 무반직 등용에 대하여 반대하는 상소의 효과이다. 이러한 <장인>에 대한 홀대는 계속되어 결국은 관료로 등용되는 길이 막히게 된다. 조선조 중기 이후는 <장인>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  


우리건축에서의 건축운영체제

다음은 건축집단의 운영체제에 대하여 알아보자. 조선조의 집을 짓기 위해 운영하는 체제를 보면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직영체제와 비슷하다. 현재 국가발주 공사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발주 및 관리자(국가)와 설계자 및 시공자간에는 분명한 구분이 있다. 그러나 조선조에 이루어졌던 공사는 국가가 발주하고 설계하고 시공하는 체제였다. 조선조에는 대규모 건설공사가 이루어질 때는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도감을 관리하는 도제조(都提調) 밑에 관리직을 두고 그 하부에 공사를 담당하는 장인을 두어 집행하도록 하였다. 초기에는 <장인>의 직위가 正五品의 직책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관리직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수준이었을 것이다.(상기서 131쪽)

조선조 초기에 어느 정도 보장받았던 <장인>의 품계가 점점 낮아지는 것은 <장인>의 위상변화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조선조 초기 높은 품계를 받았던 장인은 그에 걸 맞는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직위가 점점 낮아지면서 <장인>의 자문행위가 점점 기술에 국한하는 수준으로 변화한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아무리 <장인>의 지위가 낮아졌다고 하여도 기술부분에 대한 권위는 살아있었을 것이다. 광해군 8년 일기에는 창경궁 증축의 문제에 대하여 '목수'와 같이 현장을 살펴보고 그의 의견에 따라 증축여부를 논의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상기서 202쪽) 기술적인 문제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즉 행정적이고 정책결정에 대한 부분은 관료의 의견이 우선되었지만 기술적인 부분은 <장인>의 의견이 반영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 초기까지 공사를 어느 정도 총괄하여 이끌어 가던 <장인>들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점점 직능인으로서 구분되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결정권은 조선시대 후기로 갈수록 대부분 문관에게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현재의 <건축가>의 역할을 '과연 사대부가 했을까'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지금의 <건축가>는 많은 결정을 한다. 특히 건축의 형태와 의장 등에 대한 결정은 건축가 고유의 몫이다. 그러나 과거의 관청 건축은 이미 많은 것이 결정되어 있었고 어떠한 면에서는 거의 규격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건물 위계와 형식까지도 이미 많은 것이 정의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관료들이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즉 관에서 발주하는 건물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의 건축적 결정요소가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전통건축에서의 <건축가>의 지위와 역할에 대하여

이제 다른 분야인 주택에서 <건축가>의 역할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자 지금 우리는 건축설계를 담당하고 디자인을 총괄하는 사람을 <건축가>라고 부른다. <건축가>라는 단어는 19세기 말 일본에서 번역하여 들어온 단어이다. 즉 건축가라는 단어는 서양의 건축행위를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단어이다. 서양에서 들어온 건축에서 <건축가>는 절대적인 위치를 점유하게 된다. 크리스토퍼 알렉산더는 건축가의 의미를 <제네럴리스트> 즉 모든 것을 아우르는 자로 정의하고 있다. 즉 건축가는 모든 것을 통솔하고 조정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의 정의가 아니더라도 현재의 <건축가>는 건축전반에 대한 의사결정에 있어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권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주택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주택을 짓고자하는 건축주는 자신의 의사를 잘 반영해 줄 <건축가>를 선택한다. <건축가>를 선택하는 행위는 <건축가>의 스타일이 자신의 견해와 일치하기 때문이고 그가 자신의 의견을 잘 반영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주택 설계는 철저하게 집주인의 의사가 기본이 된다. 따라서 <건축가>는 자신의 건축관에 기초하여 주택을 사용하는 개인의 취향과 의견을 반영하도록 노력한다. 주택설계가 이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은 주택이 철저하게 개인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택은 철저하게 집주인의 의사가 중심이 되어 진행한다.

그러나 현대 주택에서는 외관 등의 문제에서는 <건축가>의 개성이 철저하게 보장된다. 그렇다면 <건축가>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이미 결정되었을 때 건축 행위는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 가정해보자. 우리의 주택도 관청의 건물과 마찬가지로 몇 가지 제약 조건을 가지고 발전해왔다. 근본적인 문제는 형태와 재료가 그리 많이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에서 새로운 형태를 추구하거나 또는 새로운 가치관을 만든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의미가 없다. 또한 집에 대한 의식 자체도 새로움을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몇 칸 규모의 문제는 있었어도 새로운 형태를 추구한다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조선시대에 들어 더 심화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조선시대의 시대 이념으로 채택된 유교라는 새로운 가치관이 건물에 대한 욕구를 제약하였을 것이다. 만일 고려시대와 같은 분위기였다고 한다면 건축은 지금보다는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었을 것이다. '고려사'에는 높고 화려한 집을 경쟁하듯 지었다는 기록이 많이 있다. 이러한 것은 위계에 대한 개념이 조선과 같지 않아 건축이 다양하게 발전된 것이다. 또한 불교건축 역시 매우 화려하고 대단한 규모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건축에 종사하는 사람에 대한 대우 또한 조선시대와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반면에 조선시대의 건축은 매우 單調로웠다고 생각된다. 조선중기까지 도성의 기능이 행정과 군사적인데 치중되어 있었고 각종 제사 시설이 자리잡고 있었다. 반면에 도시 생활의 활기를 불어  넣을 수 있는 유희시설과 도시의 경관에 화려함을 안겨주는 불교사찰도 거의 없는 상황이어서 침체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조선시대건축의 이해/김동욱/51쪽 참조) 이러한 사회구조 하에서는 다양한 건축이 발전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건축 형태와 구조가 단순해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인>에 대한 지위와 성격은 고려시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화되어 갔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건축에 대한 지식은 기능위주가 되고 건축에서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건축가>의 다양한 실험정신은 근원적으로 발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설사 많은 실제적인 부분의 것을 '사대부'가 결정하였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건축의 행위와 같은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신영훈선생의 견해에 의하면 '사대부'가 풍수에 의한 집터를 본 것은 아니라고 한다. 대부분 마을의 웃어른이 집터를 보아주었다고 한다. 또한 집터보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혈이 아니라 수맥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혈의 의미보다는 수맥을 피하는 터잡기가 핵심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수맥보기는 경험이 많은 어른의 몫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대부'가 결정한 것은 주로 집의 규모와 형식 정도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또한 도편수의 정도의 안목이라면 당시에는 어느 정도 평면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집을 짓는 과정에서 건축주와 도편수간의 상당한 대화를 통해 평면이 완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최소한 집이라는 건축행위에서 '사대부'가 한 작업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현재의 <건축가>의 행위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할 것이다.

건축이라는 문제를 제외한 다른 부분에서의 문제는 조금 성격을 달리한다. 한양 조성에 있어 집권 사대부의 역할은 매우 컷을 것이다. 초기 도성의 위치설정에서 비롯하여 도시계획의 모든 것을 결정하였다.(朝鮮初期 漢陽都城의 奠都科程과 風水地理的 特性/이상해) 그리고 '화성축성공사'에도 정약용을 비롯한 많은 신진학자들의 주도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예가 모든 건축이 이렇게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한양이나 화성 축성은 당시 국력의 모든 것을 투입하여 만들어낸 성과이다. 따라서 모든 국가역량이 투입된 것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정약용도 정조의 명을 받아 연구하여 많은 새로운 시책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지금과 같은 직업화된 <건축가>라고 하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건축가>라고 함은 건축행위를 직업으로 하는 것을 뜻한다. 대부분의 경우 관료계층이 지속적으로 건축활동을 활발하게 한 것이 아니고 일회성으로 끝나버린 것이다. 즉 대부분의 건축활동은 지금이 개념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건축에서 나타나는 건축장인의 호칭

건축에서 나타나는 호칭은 '지유(指諭)', '대목(大木)', '도편수(都邊首/都片手)' 등이 있다. '지유'는 라는 단어는 가장 오래 전부터 나타나는 단어이다. 조선시대(1430년) 초에 작성된 무위사 극락전 묵서명에 '지유'라는 명칭이 나오고 유사한 발음인 '지위(指慰)'라는 명칭이 1490년 <송광사미륵전조성상량기>에 나온다. 여기서 '지위'는 신라시대 금석문에 이두어로 절(節)로 표기하며 지시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지유'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목업지유 식업지유 등과 같이 말단작업을 지휘하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표현으로 정착된다.(한국건축공장사연구/121쪽 참조) 신영훈선생은 '지유'라는 의미를 현재의 <건축가>와 비슷한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다. 신영훈선생은 '지유'는 건축에 관련된 깊은 지식을 가지면서도 기타의 학문에도 깊은 지식을 가졌다고 정의한다. 불국사와 석불사를 지은 김대성이 대표적 '지유'에 해당된다고 한다.

건축의 장인을 지칭하던 '지유'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이후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목은 고려말부터 건축을 총괄하는 대표 장인으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명칭이다. 봉정사 극락전 상량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조선조 초까지 가장 빈번하게 나타난다. 조선조 초기 '대목'은 고위관직에 있으면서 그 아래 건축기술자를 거느리고 공사의 기술적인 부분을 주도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대목'이 '도편수'라는 명칭으로 바뀐 것은 18세기부터이다.

18세기 이전에는 '편수'가 대목 아래 있는 직종의 장을 의미하였다. 즉 左邊木手. 右邊木手. 木手邊首. 溫突邊首, 泥匠邊首, 椽木邊首, 道里邊首 등과 같이 특정 직종의 장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각 직종의 장을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도편수'라는 명칭이 사용되게 되었다. '도편수'라는 단어는 都邊首와 都片手 둘로 표현되는데 하나는 都邊首는 주로 관공사 기록에 나타나고 都片手는 절의 공사기록에서 나타난다. (상기서 11장 참조)

'도편수'라는 단어는 아마도 '邊首'에서 시작되었고 '片手'라는 단어는 음차의 가능성이 높다. 조선조 초기의 남대문의 상량기에 '대목' 아래 '左邊木手', '右邊木手'가 조직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대목' 밑에 목수를 좌우 두 패로 나누어 관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관례가 전파되면서 '편수'로 변경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출처 : 한옥 건축 전문인 5기
글쓴이 : 안창숙 원글보기
메모 :